“의미 없이 말하는 연습” – 말하기에서 ‘의미’를 걷어낸다는 것의 역설
외국어를 배울 때 우리는 대부분 ‘이 단어가 무슨 뜻이지?’라는 질문부터 던진다. 오늘은 의미는 잊고, 발음에만 집중하기 - 외국어 말하기의 감각화 실험에 대한 글을 소개해드릴려고 합니다. 의미를 알아야 말이 되고, 문장이 되어야 말이 통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 ‘의미 중심의 접근법’이 오히려 내 외국어 말하기를 막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특히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 완벽한 문장을 만들지 않으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습관, 그리고 말하면서도 머릿속에서 번역하느라 발화가 늦어지는 상황들. 이 모든 불편함의 근원이 어쩌면 “이 말을 반드시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언어를 바라보기로 했다. ‘의미는 잠시 내려놓고, 소리 자체에만 집중하는 실험’을 해보자.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뜻도 모른 채 소리만 흉내 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모국어를 익혀온 경험이 있다. 갓난아기 시절, 우리가 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똑같이 따라 하면서 소리를 익혔고, 감정을 연결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의 ‘감각’을 먼저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외국어 감각화 실험”. 이 실험의 규칙은 단순했다.
말의 의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외국어 문장이나 단어를 들으면, 의미를 떠올리지 않고 곧바로 따라 말한다.
녹음해서 비교하며 발음의 ‘비슷함’만을 기준으로 피드백한다.
이 과정을 일주일간 매일 1시간씩 반복한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다. 단어 뜻을 아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이건 무슨 뜻이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누르고 ‘그냥 소리’로만 접근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입이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외국어 문장도, 그 발음을 ‘뜻’ 없이 흉내 내려 하니 오히려 훨씬 더 자연스럽고 리듬감 있게 나왔다. 마치 악보 없이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듯, 언어를 귀와 입으로만 감지하고 재현하려 하다 보니, 의미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속에서 더 ‘말하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 실험은 내게 언어를 새로운 차원으로 보게 해줬다. 언어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득하고 느끼는 리듬과 에너지라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몸에 스며들면, 의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 이건 단순한 연습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철학적 접근 방식의 전환이기도 했다.
귀와 입의 리듬을 일치시키는 경험 – 발음의 ‘모사’가 가져온 해방감
이 실험을 이어가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는, 바로 귀와 입이 처음으로 ‘같은 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보통 외국어를 들으면 귀는 소리를 받고, 머리는 뜻을 해석하느라 바쁘고, 입은 그 해석을 다시 번역해서 말하느라 늘 지연된다. 하지만 의미를 빼버리고 나니, 귀에서 들어온 소리가 거의 곧바로 입으로 튀어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치 에코처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따라 말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언어 모사 훈련’이라고 불렀다. 의미는 제거하고, 발성의 정확도만 추적하는 방식이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의 짧은 문장들을 준비해두고, 유튜브 영상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대로 복제했다. 이때 중요한 건, 내가 말하는 소리가 원어민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발음’보다는 ‘리듬과 감정’이었다.
신기한 건,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히 발음하려고 애쓰기보다 전체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집중하자, 오히려 발음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뇌가 소리를 덩어리 단위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치 노래를 따라 부를 때, 가사를 모를 때는 대충 흥얼거리다가, 반복하다 보면 뜻도 없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험처럼.
실제로 3일차쯤 되자 나도 모르게 말끝의 억양이 원어민과 닮아갔다. 영어의 경우, 평소에 ‘강세’에 민감하지 않던 내가 어느새 특정 단어에 힘을 주고 끌어당기고, 문장 끝을 올리거나 내리는 식으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뜻을 알기 때문에가 아니라, 소리만으로 감정을 추론하고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느낀 또 하나의 흥미로운 변화는,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평소 같으면 ‘이 말이 맞나? 이 문법이 이상하지 않나?’를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게 되는데, 의미를 고려하지 않다 보니 말문이 훨씬 빨리 트였다. 말하는 것이 놀이가 되었고, 틀릴 걱정 없이 ‘따라 하기’를 통해 언어와 친해질 수 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틀릴까 봐가 아니라, 망설이기 때문이다. 그 망설임의 대부분은 ‘정확한 뜻 전달’에 대한 강박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강박을 없애고 오히려 소리만 따라가다 보니, 외국어가 처음으로 ‘말하는 행위’ 자체로 즐겁게 느껴졌다.
언어는 정보가 아닌 음악 – 감각화 실험 이후의 변화들
이 실험을 한 주간 진행하고 난 후, 나는 언어에 대한 내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외국어를 정보의 그릇이 아닌, 감각의 리듬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새로운 언어를 접할 때, 그 의미부터 알아내려 하지 않고, 먼저 그 소리가 주는 느낌과 울림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말이다.
이런 변화는 일상 속에서도 감지됐다. 외국어 방송을 볼 때 예전에는 자막을 보며 해석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자막 없이 소리의 리듬과 감정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처음 듣는 문장이어도 말하는 방식이나 억양에서 그 사람이 화났는지, 놀랐는지, 아니면 농담하는 중인지 어느 정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곧 언어 감각의 확장이다. 해석 없이도 언어를 ‘느끼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또 하나 변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이 외국어를 말할 때 그 사람의 ‘억양’과 ‘호흡’을 더 민감하게 듣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음 하나하나보다는 언어의 박자와 긴장감, 문장의 흐름 속에서 그 사람이 언어를 어떻게 몸에 익히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이건 단지 내가 듣는 기술이 좋아진 게 아니라, 언어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뇌 회로가 열렸다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말하기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이다. 실험이 끝난 후 나는 다시 ‘의미’를 포함해 외국어로 말하는 연습을 시작했지만, 그때 느낀 건 분명했다. 의미 없는 모사가 오히려 내 발화 능력에 큰 기반이 되어 있었다는 것. 예전 같으면 막히고 머뭇거렸을 문장도, 이제는 머릿속 해석 없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이유는 하나다. 그 문장 구조와 발음이 이미 감각으로 익혀졌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나에게 단순한 말하기 연습이 아닌, 언어와 친해지는 방식에 대한 인식 전환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언어를 ‘의미 중심’으로만 접근해왔다. 하지만 언어는 본질적으로 ‘소리’이며, 소리는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몸으로 체득된 언어는 뇌에 각인되고, 그 뇌의 언어는 결국 말이라는 행위로 피어난다.